서른 일곱의 전도유망한 하버드대 뇌과학 연구원이었던 질 볼트 테일러 박사(60)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예기치 못한 불운 앞에 그가 처음 내뱉은 말은 “멋지다”였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판단하던 목소리, 즉 좌뇌의 재잘거림이 멈추자 더없는 평화가 찾아왔다. 

8년 간 재활을 거친 끝에 그는 기적적으로 테드(TED) 강연 무대에 섰다. 뇌과학자가 직접 겪은 뇌졸중 경험담에 전 세계 500만 명이 열광했다. 그의 이야기를 담아 2011년 국내 출간된 ‘긍정의 뇌’가 올해 초 뇌과학 열풍을 타고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윌북·1만3800원)로 다시 나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입소문만으로 뜨거운 반응을 이끌며 반년 넘게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10위 권을 유지하고 있다. 

e메일로 만난 테일러 박사는 “뇌졸중을 겪으면서 몸을 구성하는 세포와 신경 회로들을 하나하나 자각하게 됐다. 그리고 얼마든지 감정과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내 영혼이 우주와 하나이며 주위의 모든 것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 황홀했다.…회복이라는 것이 항상 스트레스를 느끼는 삶을 의미한다면 회복하고 싶지 않았다.’(p74)

테일러 박사에 따르면 두 개의 뇌는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우뇌는 거시적 관점에서 정보를 취합하고, 좌뇌는 큰 그림을 잘게 쪼개 보여준다. 좌뇌는 사물을 범주에 따라 나누지만 우뇌는 직관으로 파악한다. 좌뇌는 언어로, 우뇌는 그림(이미지)으로 사물을 파악한다. 그는 “좌뇌가 무너져내린 이후 소통과 학습은 물론 걷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지금 현재의 순간에만 집중하게 돼 ‘행복의 나라’로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뇌의 세상에 주저앉을 순 없었다. 인지·학습 능력과 소통 능력을 되찾기 위한 마라톤 여정이 시작됐다. 뇌 속의 언어 파일이 모두 망가져 신생아처럼 알파벳부터 익혀야 했다. “(퍼즐) 조각의 똑바른 면을 위로 놓으라”는 어머니의 말에 “똑바로 놓는 게 뭔지, 모서리가 뭔지” 물어야 했다. 재활 과정에서 그는 새삼 수면의 강력한 치유력을 확인했다고 한다.

“뇌세포는 에너지를 흡수한 뒤 찌꺼기를 배출하는데, 잠자는 동안에 이른바 ‘환경미화원 세포’들이 찌꺼기를 청소해요.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이 찌꺼기가 뇌에 남아서 세포들의 소통을 방해합니다. 현실적으로 힘들지만, 알람시계 없이 개운함을 느낄 정도로 자는 게 이상적입니다.”

좌뇌를 잠재우지 않고도 평화로움을 얻으려면? 각자가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호흡, 음식의 감촉, 향초, 아름다운 풍경, 새소리, 비경쟁적 스포츠…. 원치 않는 사고 패턴을 오감의 자극으로 대체하면 의식을 평온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테일러 박사는 “목표는 좌뇌를 잠재우는 게 아니라 덜 신경 쓰는 것이다. 훈련을 반복하다보면 좌뇌의 스트레스 회로에 제동이 걸리고, 자유자재로 심신을 재충전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테일러 박사는 1세대 뇌과학자 출신 저술가다. 최근 뇌과학 분야의 화두는 신경을 원하는 방향으로 다시 구성할 수 있다는 신경가소성, 새로운 신경 세포의 생성을 연구하는 신경발생, 마음챙김(명상) 등 3가지가 꼽힌다. 세계 각국에서 뇌과학자가 쓴 책이 쏟아지는 요즘에도 그의 책은 여전히 뜨겁다. 그는 “과학과 영성의 세계가 우리 안에 공존한다는 메시지가 흥미롭게 읽힌 것 같다. 뇌를 다스려 평화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 부분도 다른 저서와 차별점”이라고 자평했다. 

어린 시절 예술과 스포츠에 능했던 테일러 박사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해부학이라는 과목과 사랑에 빠졌다. 이때 우뇌에서 좌뇌로 중심축이 이동했다. 이후 좌뇌에 뇌졸중이 생기면서 다시 우뇌가 우세해졌고, 피나는 재활을 거쳐 우뇌의 가치 구조(인간다움)에 의지하면서 좌뇌(언어와 분석력)의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는 올해 두 가지 인지적·감정적 마음을 뇌과학으로 풀어내 두 번째 책에 담아낼 예정이다.

“건강한 뇌란 당연하게도 우뇌와 좌뇌가 수평한 상태입니다. 건강한 몸에 필요한 충분한 수면, 카페인과 설탕 제어, 적당한 사회활동이 건강한 뇌를 만들지요. 우수한 뇌를 위해선 경쟁보다 놀이가 도움이 됩니다. 뇌는 정답이 아닌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발전해 나가거든요.” 

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