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들의 급소

작가 은유 등록 :2019-10-25 18:08수정 :2019-10-26 02:31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살면서 결심해본 적 있으세요연극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양구 연출가가 물었다. “담배 끊을 때요.” “회사를 자주 옮겼는데요입사할 때마다 이게 마지막이야 결심해요. 몇명이 답하자 객석에서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나도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프리랜서 시절 원고료 떼이고 사장님한테 독촉 전화 걸 때마다 제발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했던잊고 살던 좀 우울한 일화다.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는 무산되는 약속의 연쇄와 그로 인한 일상의 여진을 담았다주인공 정화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이다남편이 고공농성에서 승리해 내려왔지만 방 안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회사가 ‘복직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다생활에 쪼들리고 급기야 두 아이의 학습지 대금 지불 약속도 지키지 못한다딱한 사정을 아는 학습지 교사 선영은 회비를 대납하는 호의를 베푼다그런데 연체가 석달이 되어가자 지국장의 압박이 심해지고선영은 정화를 찾아간다.

“정말 14만원도 없어요? 고개를 숙인 정화에게 선영은 목청을 높인다정 그렇다면 매일 1만원씩 받으러 오겠다고돈이 없어도 지갑에 만원은 있을 거 아니냐고 다그친다거기에다 전 알바생 보람도 임금체불내역서를 편의점주에게 전해주기로 한 약속을 안 지켰다며 정화를 원망한다가진 자들이 약속을 어길수록 ‘을들의 다툼’은 처절하다처지가 비슷한 나머지 그들은 눈앞에 있는 사람의 ‘급소’를 너무도 잘 아는 것이다.

14만원은 두 아이 학습지 35천원짜리 4과목 수업료다누군가 뮤지션 공연 티켓으로 결제하는 금액이고질 좋은 양모 니트 한장 사는 가격이다중산층 사교육비의 십분의 일 정도이고집필노동자가 원고지 14 써야 받는 돈이다나는 부자가 되고 싶기보다 통장에 14만원이 없는 삶만원을 받아내려고 웃으며 인사하던 지인을 모욕하는 사람이 될까봐 겁이 나는데 그것이 개인의 의지나 노력의 문제가 아님을 연극이 잘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은 촌각을 다투며 일한다난 편의점 점원이 서서 계산만 하는 줄 알았다내가 계산만 하고 나오니까그런데 물품을 정리하느라 무거운 박스를 들어야 하고 무례한 고객을 응대하고 폐기 도시락까지 챙기는 점주의 눈치도 봐야 한다학습지 교사와 배달 노동자는 약속 시간이 지났다는 고객들의 독촉 전화에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어떤 일도 깊게 들여다보면 단순노동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식사 시간과 장소도 없는 열악한 일자리가 있을 뿐이고그런 자리는 이 사회의 부실한 약속의 안전망으로 인한 피해자들로 채워진다.

이 연극은 ‘파인텍 굴뚝농성’을 모티브로 삼았다고공농성이 지상의 일임을 편의점을 무대로 이야기한다. ‘노동존중 사회’라는 촛불 대통령의 약속이 요원한 가운데 고공농성은 진행형이다가스안전점검 여성 노동자가 ‘성폭력 없는 안전한 근무를 위해 우리도 형사처럼 21조 근무를 보장하라’며 고공에 올랐었다톨게이트 수납원 노동자들도 지붕을 점거했었고삼성과 싸우는 김용희도 철탑 위로 오른 지 백일이 넘었다.

왜 하필 그 높은 곳인가목숨을 건 위태로운 싸움에 나는 눈감고 싶었다연극을 보고 나니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서 올라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그래서 소심한 약속 하나 걸었다부쩍 사망 사고도 잦은데 배달음식이 늦더라도 전화하지 말자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같이 큰 약속을 어기는 권력자들김수영 식으로 말하자면 나라님이나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설렁탕집 주인야경꾼에게만 분개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