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소판 지정헌혈을 긴급으로 부탁드립니다]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혈소판 지정헌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아래 빨간 색 글을 카메라로 찍어서
지정헌혈 시 가까운 헌혈의 집을 방문하여
문진 간호사에게 수혈자 등록번호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A (+)형 남자분만 혈소판 지정헌혈 가능하십니다.
헌혈의 집 방문 전
혈소판 지정헌혈이 가능한 센터인지
온라인으로 확인하신 후
혈소판지정헌혈에 90분 소요 되오니
전자문진 하시고
예약하고 가셔요.
○ 수혈자 등록번호 : 220602-0012
○ 요청 의료기관 : 건국대학교병원(11100435)
○ 환자 혈액형 : A (+)
○ 혈액형 일치여부 : 일치(일치인 경우 동일 혈액형만 지정헌혈 진행가능)
○ 필요 혈액제제 : A-PLT[M]
○ 진행기간 : 2022-06-02 ~ 2022-08-01
★ 헌혈 전 헌혈자 유의사항 및 기타정보를 아래 링크를 통해 반드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지정헌혈 및 헌혈자 유의사항 안내 ◀
☞ https://biss.bloodinfo.net/direct_donation_hos.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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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근처의 헌혈의 집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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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 한마음혈액원 홈페이지 ◀
☞ https://www.bloodnet.or.kr
하루 2 분 이상 지정헌혈이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의 : 김운용(010-9158-0254)드림
문의 : 김운용(010-9158-0254)드림
[백혈구 성분헌혈을 긴급으로 부탁드립니다]
1. 기준 : 나이 만 17세 이상 만 60세 미만
A (+)형 남자분만 백혈구 성분헌혈 가능하십니다.
체중 50kg 이상
사진 있는 신분증 지참
2. 전자 문진하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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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의 "로그인 없이 문진하기" 클릭하시고 전자문진하시기 바랍니다.
3. 절차 : 총 3회 내원
1)사전검사 : 월~금 14시30분까지 서울 건국대학교병원 2층 성분헌혈치료실로 오셔요. 20분 소요. 기록카드 작성. 적합한 경우 개별 통지함.
2)적합통보 받으신 분 : 헌혈 전날 서울 건국대학교병원 9층에 21시에 오셔서 촉진제 맞음. 동의서 작성. 다음 날 9시에 헌혈
3)헌혈 : 서울 건국대학교병원 2층 성분헌혈치료실에서 2시간 소요. 사전검사 받으신 날부터 1주일 안에 헌혈.
하루 3 분까지만 백혈구 성분헌혈 사전검사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나를 사랑하자][항PORT 땅LAND ->땅항->당항포구] 아르헨티나의 포트랜드가 당항포이다. 이순신 장군이 싸우던 그 곳이다. 세계지도에서 아르핸티나의 포트랜드를 포클랜드로 바꿔버렸다. 오래 된 세계지도에 보면 포트랜드 PORT LAND로 되어 있다.]
감사합니다.
2021년8월17일 - 2022년4월9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서
김운용(010-9158-0254)드림
1982년, 잉글랜드해군의 HMS 인빈서블이 아르헨티나와의 치열한 포틀랜드 전쟁후 자국으로 귀환한다.
이로인해 영국은 248명의 인명피해/아르헨티나는 649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패전의 책임감으로 밀려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이는 사실상 그나라의 군사독재정권의 붕괴라는 결과를 낳았다.
2. 제1차 당항포 해전[편집]
2.1. 개요[편집]
제1차 당항포 해전 | ||
시기 | 1592년 7월 13일 (음력 6월 5일) | |
장소 | 조선 경상도 고성 당항포 | |
원인 | 충무공, 남해 제해권 도모(圖謀).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전선 51척 | 전선 26척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지휘부 괴멸 전선 26척 침몰 |
결과 | 조선 수군의 승리 |
2.2. 상세[편집]
조선 연합 함대는 6월 5일 아침 안개가 걷히자마자 당항포로 진격하였는데 포구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모여 있었다. 연합 함대는 당항만 어귀에 전선 4척을 숨겨두고, 거북선을 앞세워 일제히 공격을 가하였다. 조선 수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일본 수군도 조총을 쏘아 대며 대응 태세를 취하였다. 이에 아군은 왜군의 육지 탈출 봉쇄와 주민 보호를 위해 왜군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한 뒤, 왜선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였다. 왜선 대부분은 여기서 격침되었고, 도주하는 나머지 왜선들도 모두 추적해 불살랐다. 4척의 대선은 육지로 도망쳤으며, 도망친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남겨둔 대선 1척은[4], 패잔병들이 몰래 배에 올라타 도주하려 배에 올라타자 미리 이순신의 명을 받은 방답 첨사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에 의해 6월 6일 새벽에 섬멸되었다. 이때 원균이 적선에 올라타 수급 50여급을 베어내기도 했으며[5] 방답첨사 이순신도 활을 직접 쏴 적장을 맞춰 죽이는 전과를 세웠다.[6]
1592년 6월 7일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해상 전투를 벌인 조선 수군은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웅천 증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23척,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25척, 경상 우수사 원균이 3척 등 모두 51척의 전선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이때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대선 5척, 소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정오 쯤에 영등포 앞에 이르자 조선 수군은 세차게 배를 몰아 율포만으로 추격해 들어갔으며 대선 2척을 나포하였고, 중선 5척을 불사르고, 일본 수군을 36명의 목을 베었다.
이 율포해전을 끝으로 2차 출동은 마무리되었다.
3. 제2차 당항포 해전[편집]
수륙 병진책이 무산된 일본 수군이 거제도 내륙을 오가며 살인·납치·약탈을 일삼던 1594년 3월 4일(양력 4월 23일)에 행해졌다. 아군 연합 전선 124척이 참가한 대규모 해전으로,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의 치밀하고 신속하며 정확한 전략으로 압승을 거둔 해전이다. 연합 함대의 제6차 출전이자, 전투로는 12번째 해전이다.
3월 4일 새벽 이순신은 함선 20척을 거제도 견내량으로 보내 수비하도록 하고, 동시에 전라 좌수영과 경상 우수영에서 각각 10척, 전라 우수영에서 11척을 선발해 공격 함대를 편성하였다. 공격 함대의 사령관은 어영담을 임명하였다. 이순신은 나머지 3군 함대를 이끌고 학익진을 펼치며 함대 시위를 하는 한편, 다른 왜군의 지원과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한 준비까지 철저하게 마친 뒤 공격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조선 수군의 완벽한 전략 앞에서 손 쓸 틈도 없이 일거에 무너졌다. 먼저 어영담 함대에 의해 10척이 격파되고 불태워졌다. 이어 나머지 21척도 당항만으로 진격해 들어간 아군에 의해 모두 불태워지고, 패잔병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육지로 도주하였다.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예비대 편성, 신속한 기동력, 적 주력 부대의 퇴로 차단 등 이순신의 용의주도한 전략이 돋보인 해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제2차 당항포 해전은 원래는 수륙 협공 전략이었으나 육군의 무미건조적인 태도로 인해 육지로 달아나는 왜군을 섬멸하지못한 전투로 묘사했다.
4. 기타[편집]
전란 발발 직전 일본은 대규모의 간첩을 파견하여 조선 전역을 탐색했고 이는 경상도 고성 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날 행인으로 위장한 첩자가 고성의 한 주막[7]에 들렀는데 주인장이 일본 간자의 짐에 들어있는 지도를 보게 되었고 그 퀄리티에 놀란 나머지 자신이 살고 있는 고성 땅을 통째로 칠해버린 것. 주인장이 칠한 건 바다를 뜻하는 색이였고 다음날 일본 간자는 주인이 수정한 지도를 들고 떠났다는 얘기로 그래서 일본군이 문제의 지도를 보고 당항포를 뚫린 바다로 착각해 진입했다고 한다. 확실히 지금의 고성 읍내만 적절히 칠해주면 뻥 뚫린 바닷길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당항포 해전 직전에 사천과 당포(통영 부근)에 진출했던 왜군이 털린 것으로 봐서 위의 썰이 진짜일 가능성은 낮다.
5. 관련 문서[편집]

포클랜드 전쟁
포클랜드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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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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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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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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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육군 1만 1명 해군 3119명 공군 1069명 군함 38척 항공기 216기 총병력 14,189명 | 육군 1만 700명 해군 1만 3000명 공군 6000명 항공모함 2척 구축함 8척 호위함 15척 디젤잠수함 1척 원자력잠수함 56척 항공기 117기 총병력 29,700명 | ||||||
피해 규모 | |||||||
649명 전사 1068명 부상 1만 1313명 포로 헬리콥터 25대 파괴 경순양함 1척 침몰 장갑함 1척 침몰 수송선 4척 침몰 경비정 2척 침몰 총 1717명 사상 공군 100대 손실 잠수함 8척 침몰 | 258명전사 777명 부상 115명 포로 씨 해리어 6기 파괴 해리어 GR.3 4기 파괴 헬리콥터 24대 파괴 구축함 2척 침몰 프리깃함 2척 침몰 LSL 1척 침몰 LCU 1척 침몰 콘테이너선 1척 침몰 총 1035명 사상 공군 34기 손실 |
포클랜드 전쟁(영어: Falklands War, 스페인어: Guerra de las Malvinas, Guerra del Atlántico Sur)은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자국과 가까운 포클랜드 섬(혹은 말비나스 섬)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침공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되었으며,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은 실각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전쟁을 두고 말비나스 전쟁이라고 부른다.
배경[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20년 4월) |
아르헨티나가 ‘말비나스’라고 부르는 이 섬은 1690년 영국의 존 스트롱이 처음으로 상륙한 기록이 있다. 1764년 프랑스 왕국의 루이 앙트완 드 부갠빌이 처음으로 정착민을 데려와 살게 했다. 이 후, 섬에 정착했던 프랑스 정착민들은 1766년에 이 섬의 권리를 스페인에게 판다. 그 후 50년간 영국과 스페인은 이 섬의 일부를 각각 통치하고 있었다.
1766년에 영국인들은 이 프랑스 정착촌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영국 정착촌을 세웠고 프랑스 정착촌을 넘겨받은 스페인과 영국이 1771년 전쟁을 벌일 뻔하기도 했으나, 영국은 1774년, 스페인은 1811년에 각각 경제적인 이유로 철수했다. 이들이 철수한 이후 이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아르헨티나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당시 스페인의 영토였던 이 섬도 같이 승계했다고 주장했다.
1826년 아르헨티나는 이 섬의 영유권이 아르헨티나에 귀속된다고 공식 선언한다. 1828년에 아르헨티나는 독일인 상인을 대리인으로써 파견해서 관리한다. 그런데 독일 상인이 불법적으로 어선을 나포하고 해적질하자 자국 어선에 대한 해적질을 처단하고자 미해군 함선 렉싱턴 호가 독일 상인의 기지를 포격해서 파괴한다. 1833년 영국은 해적 행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주변 해역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전함을 보내서 포클랜드 제도를 군사력으로 점유한다.
이때 영국이 아르헨티나 식민자들을 내쫓았다는 주장이 최근 아르헨티나 정부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측 소스에서 영국 측이 오히려 식민자들에게 남을 것을 권유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부정되고 있다.
그 후 100여 년 동안 영국이 이 섬을 지배한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1946년에 이 섬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한다. 1965년 유엔총회는 식민지의 독립을 추구하는 결의(결의 2065/XX)를 채택했다. 영국계 주민들이 대다수였던 이 섬의 주민들은 아르헨티나에 의한 지배를 반대했다.
1973년 아르헨티나가 이 섬에 대해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고, 평화적인 해결을 권고한 유엔의 결의에 따라 1973년부터 영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협상이 진행되지 않으면서 1982년 3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토 문제 해결을 위한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공식 선언한다. 이로써 영국과 갈등을 겪는다. 1982년 4월, 아르헨티나는 이 섬을 '회복'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침공한 후 짧게나마 점령에 성공한다.
침공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영유권 때문이라기보다, 아르헨티나의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한 내부 문제를 외부의 위기로 해결하려는 고전적인 정치 수단의 일환이었다. 즉, 인플레이션과 실업, 정치 혼란, 강제수용소에 반독재 투쟁인사들을 투옥, 고문한 군사독재정권의 인권침해를 비판하는 목소리 등을 잠재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영국 정부가 남대서양의 끝에 있는 별볼일 없는 섬에 무력으로 개입할 것 같지는 않다는 판단도 무력 점령을 시도한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 당시 포클랜드 주둔 영국군은 해병대 코만도 소속 수십 명에 불과하였으며, 이들 모두는 포로가 되었다.
경과[편집]
1965년 유엔은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영토분쟁에 대해서 합의할 것을 촉구했다. 영국 외무·영연방부(Foreign and Commonwealth Office)는 포클랜드 제도가 남아메리카에서 영국 무역에 대한 골치거리이자 장애물이라 여겼고, 아르헨티나에 섬들을 양도할 준비까지 했었다.
결과[편집]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의견이 엇갈리거나, 중립을 지킨다. 영연방 국가들은 이 제도에 대한 영국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들 중 카리브 공동체 국가들은 최근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지지함을 밝혔다.[17][18] 유럽연합은 이 곳을 회원국의 특수해외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페루는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포클랜드 전쟁 중 물자지원을 하기도 했다. 중남미 제국(諸國)과 그 국제기구들(메르코수르(MERCOSUR), 남아메리카 국가 연합)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칠레는 포클랜드 전쟁 중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퇴임 이후에는 아르헨티나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19][20]. 유럽연합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또한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다[21].
미국은 1940년대 이래 공식적으로 이 제도의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 중에는 영국에 대해 물자 및 정보지원을 실시했다[22]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 자국 내의 언론 통제를 이용하여 자국 국민들에게는 이 전쟁이 아르헨티나의 승리로 끝났다고 거짓말을 했으나 마리오 켐페스, 디에고 마라도나 등 1982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던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스페인을 다녀와서는 자국 언론과 기자회견을 열어 사실은 영국이 이겼다는 것을 발표했으며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군부는 대통령이 계속 바뀐 끝에 레이날도 비그노네를 끝으로 군정이 종식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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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편집]
- ↑ Caspar Weinberger, In the Arena: A Memoir of the Twentieth Century, with Gretchen Roberts (Washington, DC: Regnery, 2001), 374.
- ↑ Paul Reynolds, "Obituary: Caspar Weinberger," BBC News, 28 March 2006.
- ↑ Graham Jenkins, "Reagan, Thatcher, and the Tilt," Automatic Ballpoint, 7 May 2010.
- ↑ John, Nott (2002). “Here Today, Gone Tomorrow”. 22 November 2010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A remarkable world-wide operation then ensured to prevent further Exocets being bought by Argentina. I authorised our agents to pose as bona fide purchasers of equipment on the international market, ensuring that we outbid the Argentineans. Other agents identified Exocet missiles in various markets and covertly rendered them inoperable, based on information from the French. (John Nott, defence minister during the Falklands war)
- ↑ “Falklands War cartoon”. 《NZ History》. Ministry for Culture and Heritage. 2013년 11월 20일. 2018년 9월 17일에 확인함.
- ↑ Black, Joanne (2013년 4월 9일). “From our archive: when Rob met Maggie”. 《Noted》. New Zealand Listener. 2018년 11월 3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9월 17일에 확인함.
- ↑ Freedman 2005b, 397쪽
- ↑ “Falklands: MT message to President Stevens of Sierra Leone (thanks for allowing Navy ships to refuel at Freetown)”. 《Margaret Thatcher Foundation》. 1982년 4월 24일. 2018년 10월 8일에 확인함.
- ↑ Fremont-Barnes, Gregory. “An A-Z of the Falklands War”. 《The History Press》. 2018년 10월 16일에 확인함.
- ↑ Robin Yapp (2011년 4월 20일). “Israel 'supplied arms to Argentina during Falklands War'”. 《Daily Telegraph》 (London). 2012년 4월 18일에 확인함.
- ↑ “'Begin aided Argentina during Falklands War to avenge the British'”. 《Haaretz》. 2011년 4월 21일. 2012년 4월 18일에 확인함.
- ↑ “The Peruvian Exocet connection in the Falklands/Malvinas war”. 《Mercopress》. 2012년 4월 3일. 2012년 4월 21일에 확인함.
- ↑ “El otro rol de Peru durante la guerra de Malvinas”. 《Infobae》 (스페인어). 2012년 4월 1일. 2012년 5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4월 21일에 확인함.
- ↑ 가나 van der Bijl, Nick (1999). 《Nine battles to Stanley》. Leo Cooper. 141쪽. ISBN 978-0850526196.
The Junta were slow to admit defeat, but when the news was broadcast, Venezuela and Guatemala offered to send airborne units to 'smash the British in the Falklands'.
- ↑ Hernan Dobry in article Kadafi fue un amigo solidario de la dictadura durante Malvinas Archived 17 September 2011 - 웨이백 머신., in Argentine newspaper Perfil on 27 February 2011, in Spanish language
- ↑ 가나 “Brazil helped Soviet support operation for Argentina during the Falklands conflict”. 《MercoPress》. 2012년 4월 23일. 2012년 6월 6일에 확인함.
- ↑ “Microsoft Word – Declaracion_Malvinas_en” (PDF). 2011년 7월 22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3월 15일에 확인함.
- ↑ “Caribbean Daily News, ''CARIBBEAN: Former diplomat concerned about region’s stance on Falklands''”. Caribbeandailynews.com. 2010년 2월 26일. 2010년 3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9일에 확인함.
- ↑ “CHILE REAFIRMA SU POSICIÓN SOBRE ISLAS MALVINAS”. 《Ministerio de Relaciones Exteriores de Chile.》. 2004년 8월 18일.
- ↑ “La OEA convocó a resolver "sin demoras" el conflicto por Malvinas”. 《La Capital.》. 2004년 6월 9일.
-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Mfa.gov.cn》. 2010년 7월 13일. 2011년 11월 20일에 확인함.
- ↑ Lawrence Freedman (2005). 《War and diplomacy》. The Official History of the Falklands Campaign II판. Abbingdon: Routledge. 379쪽. ISBN 0-7146-5207-5.
외부 링크[편집]
-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의 기원
- 한국국방연구원 세계 분쟁 데이터베이스 중 관련 부분 Archived 2007년 9월 28일 - 웨이백 머신
- 불타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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